베이징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거리의 산시성 시안은 중국 산시성의 성도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도시입니다. 중국의 미래를 보려면 상하이로, 중국의 현재를 보려면 베이징으로, 중국의 과거를 보려면 시안으로 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중국의 중심지 시안은 서유기, 초한지, 삼국지 등 중국 역사 소설의 배경이 된 지역입니다. 육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유일하게 옛 성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진시황릉
중국 역사 최초로 통일 제국을 수립하고 왕국을 건설한 왕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였던 당시 500년에 걸쳐 온 나라가 전쟁을 치르던 때 혼란한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인 법가, 도가, 유가 등 다양한 학파들이 모여 통치 방식에 대한 논쟁을 하였고 당시 변방에 있던 진나라는 '모든 것을 다 법으로 다스린다'라는 법가 사상을 수용하면서 태자도 예외 없는 완벽한 법치주의였습니다. "정해진 날짜까지 성을 점령하면 확실하게 보상하겠다."라는 것에 이 나라의 병사들은 미친 듯이 점령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221년에 나머지 국가를 통일하게 됩니다. 각국의 군주를 '왕'이라 부르던 시절 삼황오제라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으로 세명의 황과 다섯 명의 오제가 있었는데 '삼황'과 '오제'에서 각각 따와서 최초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한 '진 나라의 첫 번째 황제'를 뜻하는 진시황제입니다. 진시황릉의 비석 뒤에 산 처럼 보이는 것은 진시황릉의 봉분으로 기원전 246~208년 약 38년 동안 지어진 지시황릉으로 도서로 345m 남북으로 350m 높이가 76m에 다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엄청난 크기입니다. 내성과 외성이 봉분을 둘러싼 형태로 외성을 기준으로 축장 978개 크기 231만㎡ 약 70만 평에 다라는 엄청난 크기로 서울 면적의 6분의 1 규모라고 합니다. 공식 명칭은 '여산'으로 지상뿐만 아니라 지하 공간도 엄청난 면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진시황릉 내부 출입은 불가하고 아직 발굴조차 이뤄지지 않은 미지의 공간입니다. 진시황릉내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에 '여산에 시황제를 매장했다. 궁궐 안에는 여러 가지 보물들이 가득했다. 수은으로 여러 개의 강과 바다를 만들어 놨다. 인어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진시황이 사망한 지 100년 후에 쓰인 기록으로 학계에서도 사마천의 기록은 허구일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현대에 와서 실제 진시황릉을 조사해 보니 봉토 안 수은 함량이 주변의 20배 이상으로 사마천이 기록한 수은 강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발굴을 보류한 진시황릉 베일에 싸여 있는 압도적인 규모로 엄청난 궁금증을 유발하는 진시황릉입니다.
병마용 박물관
진시황을 지키는 수많은 병사 병마용 진시황릉에서 병마용 박물관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버스로 약 1.5km 거리입니다. 병마용 박물관은 유명 관광지로 일방문객을 6만 5천 명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병마용 박물관 입장료 한화 약 24,000원) 엄청난 넓이의 병마용 제1호갱은 10분의 1도 발굴 안 한 것이지만 보는 순간 가만하게 되는 엄청난 크기라고 합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경이로운 병마용의 디테일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시황의 권력을 가늠할 수 있는 병마용은 진시황릉에서 1.5km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고고학적 접근으로 진시황의 사후 세계를 지키는 병사들일 것이라 추측하지만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병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진나라의 군대 진법과 일치하는 모습의 병마용갱, 병마용 마다 각기 다른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발굴 초기에는 진짜 사람에게 흙을 덧붙인 거라 생각하여 깨 보았지만 없었다고 합니다. 병마용 제1호갱은 1974년 3월 양쯔파 우물을 파려던 농부가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1번이라고 쓰여있는 장소가 바로 병마용이 처음 발견된 장소라고 합니다. 1974년부터 대대적 발굴을 시작하였고 여전히 발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병마용 제2호갱은 1 호갱 북서쪽 2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병마용 제3호갱은 1 호갱의 남서쪽 2 호갱의 서쪽에 있다고 합니다. 2 호갱에서 가장 인기 많은 병마용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활을 쏘는 자세의 도용인 궤사용으로 석궁은 부식되었지만 활을 쏘기 위한 무릎을 꿇은 자세 덕분에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뒷면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으며 흠집 없는 외모로 관람객에게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가슴에 수많은 훈장을 달고 기품 있는 모습의 고급간부 도용, 살아 움직일 듯한 말과 마부의 모습인 말을 모는 도용인 어수용은 정교하게 만든 말의 모습 덕분에 인기 있는 도용이라고 합니다. 2200년 전에 만들어진 병마용의 색깔은 원래 황토색이 아닌 컬러풀한 색으로 1974년도 발견 당시만 해도 색이 남아 있었지만 발굴 과정 중 햇빛과 공기에 노출되며 본래의 색깔이 대부분 날아가버렸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가 유럽의 복원기술자를 소환했지만 현대 기술로는 복원이 불가하다고 하여 이후 발굴 속도를 늦추며 더 나은 복원 방법을 찾는 중이라고 합니다.
시안의 명물 음식 천하제일면
시안의 명물 음식 이름부터 기세가 남다른 '천하제일면' FIRST NOODLE UNDER THE SUN 하늘 아래 최고의 면이라는 이 가게 내부에는 수많은 인증 상패가 걸려 있습니다. 이름에 비해 평범한 비주얼의 이 음식이 천하 제 일 면이라고 된 이유는 바로 납작하고 길쭉한 면발 때문입니다. 한 그릇에 단 한가닥뿐으로 면길이는 3.8m로 손으로 뽑아낸 면발이라고 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긴 면을 먹으면 장수하고 넓은 면을 먹으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천하제일면을 면과 두 종류의 육수가 나오는데 첫 번째 육수는 해삼영양탕 다른 하나는 시큼하고 매콤한 쏸라탕입니다. (한화 약 16,900원) 면이 담긴 그릇은 육수가 아닌 면수로 면을 둘 중 원하는 육수에 넣고 그릇에 젓가락으로 비벼서 면을 끊어 먹는 방식입니다. 해삼영양탕의 육수 맛은 조개탕 느낌의 담백한 육수이고 쏸라탕은 적당한 알싸함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맛입니다. 이 음식의 정식 이름은 유포몐으로 우리나라 한자로는 유발면으로 넓적한 면 위에 기름을 붓거나 국물에 적셔 먹는 요리입니다. 이 음식의 별명인 뿌앙뿌앙미엔 즉 뺭뺭몐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수타로 면발은 뽑을 때 바닥에 내리치는 소리가 뿌앙뿌앙 난다고 해서 파생된 별명입니다. 의성어인 '뱡'을 표기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는 한자 중 획수가 가장 많은 국수 이름 '뱡'을 만들었고 획이 51획이며 '뱡뱡몐'을 표기할 때만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방궁 유적지
사치와 호화의 상징인 건축물 아방궁은 사마천의 <사기> 중 "동서 700m 남북 120m의 2층 건물로 1만 명이 들어갈 거대한 규모"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당나라 시인 두목의 <아방궁부>에서는 "오보일루 십보일각, 다섯 걸음마다 누각이요. 열 걸음마다 고각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화려한 건축물의 상징이 된 아방궁이지만 진시황의 사치스러운 대규모 토목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수많은 백성들에게 결국 민심을 잃고 15년 만에 진나라의 막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현재는 건물 없이 터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진시황이 궁을 짓다가 미완성으로 완공 전 사망했지만 아들이 이후에도 계속된 공사를 하였고 완공 직후 멸망한 진나라 "초패왕 항우가 아방궁에 불을 질렀고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라고 야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정사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결국 관련 조사에 착수한 했지만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는 아방궁이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고 아방궁의 그림은 또한 후대에 그려낸 상상도라고 합니다. 미스터리로 남은 권력과 사치의 상징 아방궁입니다.